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於宇同韩文介绍

作者:佚名    文章来源:本站原创    更新时间:2017-6-12

於乙宇同어우동(어을우동)
 
 
 
  朴어우동은 승문원 지사 박윤창(朴允昌)의 딸로서 음성군 음죽현 출신이다.  어우동 또는 어을우동 등으로 불렸다. 용재총화에는 어우동(於于同), 실록에는 어을우동(於乙于同)이라 하였으며, 송계만록(松溪漫錄)과 대동시선 등에는 어우동이라고 하였다.
 
  아버지 박윤창은 음보로 관직에 올랐으며 세종11년 동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사예 등을 지냈다.  종실인 태강수 이동(泰康守 李仝)에게 출가해 외명부의 품계인 혜인(惠人)으로 봉작되었다. 그러나 그 후 어우동의 이름은 왕실 족보에서 삭제되었고, 친정어머니 정씨 역시 친정과 시댁의 족보에서 삭제되었으며, 어우동, 정씨, 박성근 사건 등으로 인해 박윤창 역시 족보에서 삭제되어 자세한 가계는 알려져있지 않다.
 
  전설에 의하면 어우동에게는 일찍부터 마음에 두었던 이웃집 남자가 있었지만, 그 남자의 집안이 한미하여 부모가 반대하였고, 눈물의 이별을 한뒤 집안의 정략에 의해 종실인 이동과 결혼했다고 한다.
 
  태종의 서증손자 태강수(泰江守) 이동(李仝)과 결혼하여 번좌라는 딸을 하나 뒀다. 이동은 세종의 둘째 형이며 태종의 차남인 효령대군의 다섯째 아들의 서자였다. 후사를 잇지 못한다는 이유로 어우동은 시댁의 무시와 냉대를 받았다고 한다.
 
 
 
  ← 어우동 스타일(이하늬 분장)
 
 
 
  알려진 첫 남성 편력은,  은기(銀器)를 만드는 은장이(銀匠)를 좋아하여 거짓으로 계집종처럼 하고 나가서 서로 이야기하며 유혹했는데, 그 사실이 알려져 어우동은 친정으로 쫓겨가게 되었다. 그러나 은장이와 간통했다는 것은 누명이라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그녀가 축출된 배경은 연경비라는 기생을 사랑한 남편 이동이 억지로 어우동의 허물을 잡아 쫓아내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성종은 이때 어우동의 간통사건은 무죄로 판정하여 기생을 사랑한 남편 이동의 잘못으로 여겨 어우동의 손을 들어줬다.
 
  태강수 이동은 기생 또는 첩에게 빠져서 함부로 부인을 버린죄로 삭탈관직을 당했고, 부인과 재결합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이동은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종친이었던 이동은 몇 개월 뒤 관직을 되찾았고 어우동은 법적으로는 태강수의 부인이었지만 버림받은 처지가 되었다.
 
  그 뒤 어우동은 딸과 종을 데리고 친정으로 갔으나 아버지 박윤창이 받아주지 않아,  길가에 집을 마련하고 거처하던 중 여종의 권고로 사헌부의 아전 출신인 오종년(吳從年)과 만나 한동안 동거하기도 하였다.
 
   그 이후로 수십 명의 선비, 조관 및 유생들과 관계를 가졌으며 그와 관계를 맺은 남자들과 그 당시 스캔들의 소상한 내용이 대동야승, 용재총화, 성종실록 등에 기록으로 남아 전한다. 이후 그는 정식으로 기녀 수업을 받고 기녀가 된다.
 
  그 뒤 여종과 함께 기생 행세를 하며 기방에 출입하던 중 남편의 8촌인 세종대왕의 서손자 방산수(方山守) 이난(李瀾)을 만나 사귀게 된다. 방산수는 세종의 서자 계양군의 넷째 서자로 어우동은 춤과 시, 재색에 능했는데 이난은 어우동의 재색에 매료되어 이후 그녀를 자주 찾았다. 이난은 자신의 팔뚝에 어우동의 이름을 새기기까지 했다.  뒤에 체포되었을 때 끝까지 그녀를 변호하고, 선처를 호소한 인물은 방산수 이난이었다.
 
 
  어우동은 성관계가 문란하였지만 반면에 시문과 가야금을 잘 다루고 춤을 잘 추었던 탓에 여러 문사들이 그녀를 보고자 직접 찾아오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기생 혹은 내금위의 첩, 혹은 과부라 소개했고 이들 여러 남성과 양반들이 그의 집에 출입하였다. 모든 남성을 성적으로 유혹하지는 않았고 시문과 서신만을 주고받는 관계도 있었다.
 
  어우동은 '감히' 글쓰기를 하며 세상에 도전한 주인공이 되었다. 기생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수많은 남자들과 여염집 여자들이 꿈도 못 꾸는 자유로운 문우활동을 했다. 여자가, 기생이 글을 쓰고 서예를 한다고 사대부들이 비웃었지만 그는 계속 그림과 서예를 계속 했고, 사람들을 탄복시킬 정도로 실력을 갈고 닦았다.
 
 
  더이상 꺼리낄 것이 없는데다 대담해진 그녀,  한번은 과거에 합격하여 유가(遊街)를 하는 홍찬을 본 어우동은 문득 간통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그 후 길에서 만나자 소매로 그의 얼굴을 슬쩍 건드렸다. 이에 홍찬이 그녀의 집으로 가 정을 통하기도 했다.
 
  그 상대가 양반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서리(書吏) 감의향이 길에서 어우동을 만나자 희롱하며 그녀의 집에까지 따라가 간통하고 어을우동의 등판에 이름을 새겼다 한다. 이러한 자유분방한 생활은 마침내 조정에까지 알려졌으며, 풍속을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체포당하게 된다.
 
  그 뒤 남편의 6촌인 수산수(守山守) 이기(李驥)를 만나 간통하게 된다. 이기는 그의 미모에 혹하여 어우동의 몸종을 불러내 누구의 딸이나 아내인가를 물었고, 여종은 내금위(內禁衛)의 첩(妾)이라고 하자, 이기는 어우동을 불러들였다.
 
  이후 그밖에 내금위(內禁衛) 구전(具詮)·학유(學諭) 홍찬(洪燦)·생원(生員) 이승언(李承彦), 서리(書吏) 감의향(甘義享), 서리 오종련(吳從連)·감의형(甘義亨), 생도(生徒) 박강창(朴强昌)·양인(良人) 이근지(李謹之)·사노(私奴) 지거비(知巨非)와 간통하였다.
 
  어유소(魚有沼)·노공필(盧公弼)·김세적(金世勣)·김칭(金偁)·김휘(金暉)·정숙지(鄭叔墀) 등도 거론되었고, 어우동의 이웃집에 살던 어유소는 자신의 조상을 모신 사당으로 어우동을 데려가서 간통하였다.
 
  김휘는 어을우동을 사직동(社稷洞)에서 만나 길가의 인가(人家)를 빌려서 정(情)을 통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행적을 우연히 접하게 된 승정원 도승지 김계창의 추적과 줄기찬 탄핵이 있으면서 공론화되었다.
 
  1480년(성종 11) 어우동의 연애 스캔들이 한성부내에 소문이 돌면서 진상을 요구하는 공론이 형성되었다. 김종직과 그가 이끄는 사림파 출신 사간원, 사헌부의 언관들과 훈구파에 의해 집중공격, 탄핵을 받고 의금부에 끌려갔다. 사림파와 일부 훈구파는 그를 계속 공격했고 사형에 처해야 된다는 주장을 하였으나 일부 훈구파와 종친들은 사형까지는 과하다 하여 중형이나 변방유배, 노비 정속 등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풍기문란으로 문초를 받았으나 어우동은 처음에는 혐의를 부인하였다. 옥중에 수감된 인물들은 양반에서 중인, 유생 등 다양한 계층이었다. 그의 집에 한번이라도 출입한 경력이 있으면 모두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들은 모두 혐의를 부인하였다. 그때 옥중에 있던 방산수 이난이 어을우동에게 이르기를 "예전에 유감동이 많은 간부로 인하여 중죄를 받지 아니하였으니, 너도 사통한 바를 숨김없이 많이 끌어대면 중죄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하였다. 그러자 어을우동이 관계를 맺은 간부들의 이름을 늘어놓았다. 문초를 받은 관계자들만 하더라도 수십 명에 이르렀다.  이난은 그 자신도 혐의가 있었으나, 상소를 올려 성종에게 어을우동의 재주가 아까움을 들어 그의 석방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일하게 그를 변호하던 방산수 이난의 권고로 관계를 맺은 남자들을 모두 고하였지만 어유소, 노공필, 김세적, 김칭, 김휘, 정숙지 등의 사대부 고관인 남자들은 모두 혐의를 부인하였고 중인이었던 박강창, 홍찬 등과 생원, 진사 등은 하옥되었다.
 
  조정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사형과 유배로 의견이 나뉘었다. 승정원은 어우동의 죄를 대명률(大明律)의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바로 개가(改嫁)한 것’에 비정해 교부대시(絞不待時: 늦가을까지 기다리지 않고 즉시 형을 집행하는 것)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그녀를 처형해야 된다는 비난여론이 계속되었고, 성종은 귀양이나 유배로 형을 정하고 불문율에 부치려 하였으나 탄핵이 계속되었다.
 
  특히 동부승지 김계창의 끈질긴 탄핵을 받게 되어 결국 성종은 승정원과 양사의 탄핵을 승인하여 1480년 10월 18일에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문란하게 했다는 죄명으로 근기감 앞에서 처형되었다. 그해 11월 13일에는 종부시의 상언으로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에서 그녀의 이름이 삭제되었다. 그러나 그와 간통했던 사람들은 가벼운 벌만 받았고, 어우동이 죽은 뒤 모두 사면되거나 실직에 복귀하였다. 어우동은 시문에도 뛰어나 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대부분 사라졌다.
 
 
  어우동은 사후 유감동, 이구지, 대방군부인 송씨와 함께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음녀의 대명사로 매도당하였다. 그녀의 시, 거문고, 가야금, 춤 등의 재주는 잊혀졌고, 다만 음탕한 여인의 대명사처럼 구전되어 왔다. 이후 야담과 소설 및 연극의 주인공으로 구전되거나 극화되었으며, 1897년(고종 34년) 광무 개혁 이후부터 연극과 구전 문학, 희곡, 영화 등의 소재로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1910년(융희 4년) 조선 멸망 이후부터 동정이나 재평가 여론이 나타났다.
 
  여러 작품을 남겼으나 몇 수의 시조가 전한다. 권응인(權應仁)은 자신의 저서 《송계만록 (松溪漫錄)》에 어우동의 시인 부여회고시를 소개하면서 "음부(淫婦)이면서 이와 같이 시에 능하니, 이른바 재주는 있고 행실이 없는 사람이란 바로 이것이다."라고 하여 그의 시적 재능은 인정하면서도 폄하하였다. 시와 서화에 능하였으나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인멸되거나 하찮게 취급되다가 실전되었다.
 
 
 
                             玉淚丁東夜氣淸              구슬은 눈물처럼 흘러 밤을 밝히고
 
                             玉淚丁東夜氣淸              구슬은 눈물처럼 흘러 밤을 밝히고
                             白雲高捲月分明              흰 구름은 높이 흘러가니 달빛은 더욱 밝아라
                             間房叔謐餘香在              한칸의 작은 방에는 님의 향기가 남아 있고
                             可寫如今夢裏情              꿈결같은 그리운 정, 그림으로 그려낼수 있겠네
                             白馬臺空經幾歲              백마대 텅빈 지 얼마나 지났는가
                             白馬臺空經幾歲              백마대 텅빈 지 몇 해가 지났는고
                             落花巖立過多時              낙화암은 선채로 많은 세월 지났네.
                             靑山若不曾緘黙              청산이 만약 침묵하지 않았다면
                             千古興亡問可知               천고의 흥망을 물어서 알 수 있으련만
 
 
 
  그녀의 작품은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도 금기시되었으나 그의 미모와 재주는 회자되어 많은 구전으로 전해졌다. 그 뒤 1910년 이후부터 각종 문학과 연극, 영화 등의 작품의 소재가 되었으며, 남한과 북조선을 통틀어 그의 일생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들이 많이 등장했다.
 
  방기환(方基煥)(1979), 신봉승(1993), 황충기(2008), 김경민(2011) 등이 그를 일대기를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 또한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 1985년에는 이장호 감독, 이보희 주연의 《어우동》이 상영되고, 1987년에는 《요화 어을우동》이 김기현 감독, 김문희 주연으로 87년 5월 개봉하였다. 2007년 SBS에서 그가 등장하는 드라마 《왕과 나》(배역:김사랑)가 방영되었다.


出身与婚姻

朴氏出身士族,是两班家庭的大家闺秀,后嫁给朝鲜王朝宗室、孝宁大君嫡五子永川君李定之庶长子、正四品泰江守李仝(이동)为正妻,封为正四品外命妇惠人(혜인)。但有人怀疑她的母亲郑氏亦有与他人私通,因为郑氏曾经说过人人都有情欲,只是她的女儿诱惑男性特别突出,更有人指她并非朴允昌的亲生女儿。 她的婚姻并不幸福,丈夫宠爱妓生燕轻飞。有一次泰江守聘银匠回家制造银器,当时的惠人朴氏见到银匠,触动了情欲,就假扮女仆与他私通,泰江守发现奸情后就把她休弃并逐出家门。

被休后的生活

她被休后返回娘家,独自坐着悲叹,女奴见到她在叹息,就安慰主人不要伤心,并介绍出身颇为高贵且容貌姣好,曾为宪府都吏的吴从年与她匹配,朴氏答应了。一天女奴邀请吴从年来到,朴氏就和他发生关系。自此她就经常遣女奴在外物色美男子,与他们发生性关系,甚至良民、奴隶也有。《朝鲜王朝实录》和《燕山君日记》都有不少她与男子有染的记载,而她遇到一些特别喜爱的男子时,还会把他们的名字刺在身上,例如把李澜、朴强昌的名字刺在手臂上,把甘义享的名字刺在背部。

有时她会假扮成民女、妾侍、妓生,经过男子的家门前,或打扮得很漂亮地出游、荡秋千,不少男子一看见她就对她有意,然后和她同床共寝。后来她成为当时有名的荡妇,艳名远播,有些男子就主动找她,想和她发生性关系,有些以假身份接近她,如良民李谨之知道她热衷于性事,就假称自己是方山守李澜的伻人(使者)去见她,有些男子甚至胁迫她发生性行为,例如密城君的家奴知巨非看见她在刚天亮时在外,就说要把她乘夜外出之事宣扬,令她下狱来威胁她与他发生关系。除了男子喜欢找她外,她也会主动引诱男子。


下场

后来於乙宇同被方山守李澜逮捕入狱,李澜说如果乙于同把所有和她有过性关系的人都供出来,她就可以免除重罪,于是她就列出了一些人名,但当中的鱼有沼、卢公弼、金世绩、金偁、金晖、郑叔墀都没查出曾经和她发生过关系,方山守就说鱼有沼曾在於乙于同隔壁借宿,然后暗中派人邀请她到祠堂发生关系,并送她玉环为信物;又说金晖在社稷洞遇到於乙于同就借了路边的住家与她性交。

朝中大臣对於乙宇同一案如何判决有不同的看法,郑昌孙 、金国光、姜希孟、李克培、洪应、韩继禧、左承旨蔡寿、左副承旨成伣等人认为,於乙于同按刑律罪不至死,建议朝鲜成宗依律把她远配;但沈浍、尹弼商、玄硕圭等人认为於乙于同身为士族之女、宗亲之妻,却无论亲戚贵贱,都可以发生关系,可谓伤风败俗,向成宗建议把她处死。最后在成宗十一年农历十一月十八日按《大明律》下令把她处以绞刑,并把她的名字从《璇源录》削除。而证实和她有过性关系的人都因应身份地位受到不同程度的刑罚,由杖刑至极刑不等,只有李承彦因为擅长射箭和精通音律,并且不知道于乙于同为士族女子,因而得到赦免,可以考科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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